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 수군 (문단 편집) == 상세 == || {{{#!wiki style="margin: -6px -10px" [[파일:조선수군조련도-세종대학교 소장.jpg|width=100%]]}}} || ||<#ffffff><(>[[세종대학교]] 홍보관에서 보유하고 있는 조선수군조련도. || 조선 초기 수군은 각 도별로 1명 내지 2명의 [[수군절도사|수군도절제사(水軍都節制使)]][* 약칭은 수사]를 두고 그 아래 포·진에 수군도첨절제사(水軍都僉節制使)[* 약칭은 첨사] 및 수군처치사(水軍處置使)등을 두었다. [[세종대왕|세종]]대에 이르러 병마도절제사의 수군 통수 문제와 관련하여 몇 차례 개편 이후 수군도안무처치사 체제가 확립되어 후대에 이르게 되었다. 초기 제도적으로 정비된 수군은 그 고된 근무환경과 열악한 조건 등으로 인하여 대립(代立) 방군수포(대신 포를 납부하여 [[군역]]을 면하는 일) 등으로 점차 군역을 기피하게 되었고, 급기야 죄인까지 수군에 충원되면서 수군은 천역으로 여겨지게 되었다. 실제로 조선 건국에 지대한 공을 세운 [[개국공신]]인 [[정도전]]의 맏아들인 [[정진]] 역시 [[숙청]]되어 [[전라도]] 수군으로 강제복무하게 되어야 했던 기록이 있다. 이에 조선 조정에서는 수군을 명예직으로 수여하고 요역을 면제하고, 여러 혜택을 배려하였으나 여전히 수군에 충원되는 것을 여러 백성들이 기피한 까닭에 [[성종(조선)|성종]]대에 이르러 수군역을 세습하게 하여 일정한 군사를 유지하고자 하였다. 이러한 수군역의 세습은 천역화를 가속화하여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[[칠반천역]]의 하나로 간주되게 하였다.[* 이 점은 [[유럽]]도 마찬가지. [[대항해시대]] [[영국 해군]]은 [[선원]]이 모자라면 부랑자나 [[죄수]]를 끌어오기도 하고, 남의 배 선원을 가로채거나 납치(!)까지 서슴지 않았다. 이를 전담하는 영국 해군 징집조인 '[[프레스 갱]]'들이 타국의 외교관도 납치했던 적이 있을 정도였다. 심지어 1812년에는 영국 해군이 미국 선원들을 납치하려다가 외교 문제로 비화되어 '''[[미영전쟁|전쟁까지 갔던 적도 있었다.]]''' 이 때문에 영국의 [[항구]] 술집에서는 납치하려는 프레스 갱과 동료를 지키려는 민간 선박 선원 또는 주민들 간의 '''집단 [[패싸움]]'''도 잦았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